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밴 플리트 (문단 편집) === [[6.25 전쟁]]의 활약 === 이후 1950년 8월에 [[메릴랜드]]에 주둔 중이던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진급이 늦은 편이라 전임자이자 이제 UN군 사령관으로 된 리지웨이 장군이 밴 플리트의 웨스트포인트 2기수 후배이다. 동기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1944년에 유럽전선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부임한 직후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 플리트 장군은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밴 플리트 장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인해전술|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것은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4월에 벌어진 중국 인민지원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CSR)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203mm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사상률을 높였는데, 덕분에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되었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제한당했다. 게다가 이 '밴 플리트 탄약량'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편 밴 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 커녕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켜 질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대대적인 군축의 영향으로 군수물자 생산이 줄었다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부랴부랴 군수물자 생산을 늘렸지만 군수물자 생산은 아직 정상화 궤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막 쏘다간 당장 물자가 바닥날 판이었다. 또한 의외로 6.25 전쟁은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나름 돈에 쪼들리면서 싸운 전쟁으로, 중공군 개입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전쟁비용으로 인해 만약 미 의회가 예산 증액안(Revenue Act of 1951)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1951년에 예산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한편 밴 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 플리트 탄약량'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출처 - 왕수쩡의 《한국전쟁》) 언뜻 보면 군사 부문에 무지한 정치인들이 유능한 장군에게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는 미군이라도 저 정도의 물자를 생산하고 전선까지 운반하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국민의 세금이고, 그 세금이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지 확인하는 건 의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약 밴 플리트가 무능한 [[똥별]]이라서 실적 없이 쓸데없이 포탄만 낭비하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2차대전 때 만성적 물량부족에 시달리던 독일, 일본하고만 싸워봤지, 2천만이 전사해도 또 병력이 쏟아지던 소련군이나 [[인해전술]] 끝판왕인 중국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병사를 밀어넣으면서 진격하는 상대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밴 플리트 장군도 한반도 역사에서 유구한 화력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현장을 볼 일 없는 미국 정치권에서는 혹시 비정상적으로 물자를 낭비하는게 아닌지 의심을 안할 수 없었다. 밴 플리트가 겪었던 실전과 보고서의 괴리는 이후 미군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사방팔방에 [[저격수]]들과 [[게릴라]]들이 몇십만 단위로 깔려있는 전장에 값비싼 [[FGM-148 재블린]] 미사일을 고작 기관총 진지나 보병 한두 명을 격파하는 용도로 쓰면서 다시 제기되었고, 결국 미군은 화력점 격파 용도로 창고에 있던 [[M72 LAW]]를 다시 꺼내야 했다. 결국 재블린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전차의 뚜껑을 효율적으로 따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여전히 보병 한두 명이나 토치카 하나 까자고 재블린을 쓰면 미 의회는 여전히 기겁한다, 그러니 LAW를 다시 꺼냈지.~~ 아무튼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을 포기하고 한국전쟁 중후반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에서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사격]] 후 [[축차투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밴 플리트 장군이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불리한 머릿수를 그에 상응하는 화력으로 보완해 전황을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이끈 점을 인정받은 밴 플리트는 1951년 7월 31일 드디어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51년 중반에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고 싶어했으나([[맹조의 발톱 작전]]), 이미 [[6.25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휴전회담에 돌입한 행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밴 플리트는 제한된 목표에 한해 '전투정찰' 명목으로 유리한 전선 확보를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기획한다. 이 과정에서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일대에서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전개된다. 이외에도 밴 플리트는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으나, 1951년 10월 25일에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유엔군 사령부 명령으로 모두 취소된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후 대규모 공세가 불가능해지자 한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 [[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이후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1월 말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나오는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1953년 시점에선 중장 계급이었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군 합참의장을 지냈다.]에게 이임하고[* 자서전의 내용으로는 근속정년이 완료됨에 따라 본래 1953년 1월에 전역할 것으로 예정되어 1952년 후반기에 이임할 것으로 예고되었지만, 마무리 준비를 위해 2개월 연기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의 여러가지 사례로 볼 때 미군/한국군의 중장급 이상 장성들은 복합적인 이유로 군인 인사관련법에 규정된 정년복무에 크게 제한받지는 않으며, 조건이 맞으면 40년 이상도 근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육군 제6군을 지휘했던 월터 크루거 대장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 사병출신 장성으로 [[미국-스페인 전쟁]] 때인 1898년을 시작으로 1900년대에 장교로 임관했고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모두 해외파병으로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초에 전역했다(48년 근속).]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전역하여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youtube(rOYgSIctcnY)]|| || 1953년 2월 21일 전역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밴 플리트 대장의 모습.[* 영상 초반은 [[여의도공항]]에서 후임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환송을 받으며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 후반은 중간 기착지인 [[도쿄 국제공항|하네다공항]]에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다.(British Pathé)]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